스크랩_지영희국악관

민족음악을 위해 영혼을 바친 지영희 선생,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다

 민족음악을 위해 영혼을 바친 지영희 선생,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본다평택호 관광단지 내 한국소리터에 ‘지영희 상설전시관’개관한국인의 고단함을 위로하려 신이 그를 보냈다
 평택호 관광단지 내 한국소리터에 ‘지영희 상설전시관’개관

  민족음악의 수호영웅이자 평택의 보물인 지영희 선생을 평택호 관광단지 내 한국소리터 ‘지영희 상설전시관(가제)’에서 재조명한다. 지난해 10월부터 이번해 3월까지 열린 <지영희 특별전>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서명운동으로 이어졌고,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지영희 상설전시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평택시와 경기관광공사가 준비해 지난달 6일부터 열린 ‘지영희 상설전시관’은 지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를 알리고 우리 국악을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지 선생이 일궈낸 업적은 물론 그가 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가슴 아픈 비화까지 알 수 있다. 당초 예정되었던 개관식 행사는 메르스 사태로 인해 잠정연기되었지만 사태가 완화되면 정식 개관식을 통해 가치를 더할 예정이다.

     
▲ 각종 공연과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함께 운영될 예정이다. 

비극적 운명을 가진 영웅 지영희 선생은 평택 포승읍 내기리의 무속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승무·검무 등 여러 춤과 함께 양금·단소·퉁소·해금·풍류 시나위·피리 삼현육각·대금 시나위·무악장단 등 다양한 음악을 배우고, 가르쳤다. 당시 왕의 도라 불리던 경기도는 한국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그 중심에 자리한 평택은 바다와 논을 낀 큰 두레문화권으로 경기음악의 요체였고, 굿과 농악 그리고 민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지 선생의 비극적 출생배경과 이러한 환경은 그의 음악인생의 큰 밑거름으로 자리 잡았고, 천재 국악인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게 되었다.

국악의 대중화·현대화·세계화 이끈 선두주자

바람 같은 민요, 오선지에 담기다

     
▲ 지영희(해금·장고) 미국 카네기홀 공연 기념 LP음반과 1973년 당시 공연을 찍은 영상 

일제의 만행이 절정에 달했던 1939년, 지 선생은 민속음악의 선율을 소재로 최초의 국악관현악 창작곡인 <만춘곡>을 발표한다. 이는 국악계의 ‘비키니 수영복’이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조선음악연구소와 경성방송국, KBS방송국의 관악담당악사 활동과 음반발매 명인들과 함께 낸 음반 또한 백여 장이 넘으며, 신상옥 감독의 작품과 벙어리삼룡이, 사도세자, 월하의 공동묘지, 장희빈 등 다수의 영화음악도 작곡했다.

     
▲ 지영희 선생이 직접 만들고 사용한 해금과지영희·성금연 부부의 해금 봉장취 고음반 

국악오케스트라를 꿈꿨던 지 선생은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서도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사라진 악기 월금을 복원하고, 현종과 양금, 비파, 아쟁 등을 개량해 국악기들이 화성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녹음기를 들고 민요를 채보하러 다니며 비바람이 불고, 폭설이 내려도 늘 길 위에서 소리를 모았다. 그것들은 <강강술래>, <매화타령>, <정선노래>, <5광대 춤노리> 등 수백여 곡으로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요를 모으는 작업에 열중하던 지 선생은 그것을 오래도록 남기고자 우리 소리를 오선지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구민요와 신민요를 통해 태평소와, 해금, 피리, 가야금교본을 만드는 것은 물론, 고정적이었던 우리 장단을 오선보에 올리기 위해 서양의 박자로 변형시키는 열정을 보였다.
지 선생은 국악의 세계화에도 앞장섰다. 196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민속음악예술제에는 각 나라마다 200여 명이 넘는 악단들이 와 공연을 했다. 그러나 한국악단의 숫자는 고작 15명뿐이었고, 프랑스 대사관 관계직원은 “북한에서 100명 넘게 온다는 것을 거절하고 남한을 초청했는데 이게 뭐냐”며 화를 냈다. 규모 면에서 너무나 초라했던 한국악단은 주눅이 들었지만 최선을 다해 연주했고, 연주가 끝나자 공연장에는 기립박수가 터졌다.

프랑스 작곡가: 코리아가 중국에 있냐? 일본에 있냐?
지영희: 우리나라는 중국도 일본도 아니고 그 가운데 있는 나라다.
프랑스 작곡가: 그럼 너희 나라의 경치가 산새가 작고 오목조목하냐?
지영희: 우리나라를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프랑스 작곡가: 너희 음악을 들어보니 그렇더라. 헌데 너희 민족은 슬픔이 많냐?
지영희: 그렇다. 우리나라는 한이 많다.
프랑스 작곡가: 아까 ‘시나위’라는 음악을 들어보니 너희 음악이 우리 음악보다 1세기가 앞섰구나. 최고다.
지영희: 메르씨보끄!

위의 대화는 연주가 끝난 후 지 선생을 찾아온 프랑스 작곡가와의 대화다. 지 선생은 이를 계기로 국악의 국제화를 꿈꾸기 시작했고, 결국 197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봉황의 큰 뜻을 참새가 어찌 알리요…
지영희 선생, 하와이에서 쓸쓸히 잠들다

지 선생은 국악관현악단을 편성했고 이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제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국악의 맥을 이을 후학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1953년 지영희고전무용음악연구소를 설립했지만 무허가 학원이란 이유로 폐쇄되었고, 그 후 1960년 서울국악예술학교에서 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아울러 지 선생은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이 힘든 국악예술고 제자들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민속음악 발전을 모색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한국민속음악예술연구원의 탄생 배경이다. 그러나 국악협회는 그것을 기존 세력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했고, 그들은 지 선생에게 한마디 예고도 없이 국악협회에서 제명시켰다.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민한 지 선생은 언젠가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 못 다한 일들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80년, 향년 72세에 하와이에서 쓸쓸히 잠들었다.

>>인터뷰 김연숙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


“작은 씨앗이 멀리   퍼져나가기를…”

지영희 선생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다. 아쉽게도 지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이들이 지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설사로서 평택에 대한 아쉬움이 많다. 현재 평택은 인구 46만인데 제대로 된 박물관 하나 없다. 이런 도시에 작은 전시관이 생겨 그래도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소리터라는 명칭에 맞게 이곳이 우리 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메카가 되길 바라며, 작은 씨앗이 널리 퍼지기를 희망한다. 이번에 마련된 지영희 상설전시관은 지 선생의 유물과 역사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전시관 안 작은 무대에서 각종 공연을 펼치며 시민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