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4. 11. 24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미신타파 정책을 발표했다. 미신이라는 이유로 전통음악이 소멸할 것을 염려한 그는 자전거로 온 나라를 돌며 무속음악 채록에 나섰다. 무속음악 뿐 아니라 농악, 풍류, 삼현육각 등 온갖 민속음악이 일제 녹음기에 담겼다. 그리고 당시 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채록된 민속악을 오선지에 음표 하나하나 오롯이 남겼다. 그는 전통음악을 기록하고 연주하는 한편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 신작 국악을 세상에 내놓았다.
옛것을 계승하되 새것을 창조한 그의 예술혼은 글자 그대로 온고지신이요 법고창신이었다.
‘우리 전통음악의 수호자’ 지영희(1909~1980). 그는 “근현대 한국 민속음악 100여 년을 통틀어 첫 손에 꼽히는 인물”(노재명)로, “해금과 피리의 명인이자 지휘자, 작곡가로 활동한 천부적인 예인”(이진원)이었으며, “전통음악을 후대에 전수한 위대한 교육자”(이보형)였다. 평택예술회관에선 지영희의 음악사적 업적을 되돌아보는 <지영희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출판사 ‘채륜’은 최근 <민족음악 수호영웅, 지영희>, <다시 보는 지영희 민속음악 연구자료집>을 출간했다. 잊혔던 지영희의 예술혼을 본격 재조명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경기도 평택 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명인들로부터 우리 음악을 두루 섭렵했다. 조항련에게 호적을, 정태신에게 양금을, 지용구에게 해금을, 양경원에게 피리를, 김계선에게 대금풍류를, 방용현에게 대금산조와 풍류를, 최군선에게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 장고를, 박춘재에게 경기소리와 서도소리를, 신쾌동에게 거문고산조를, 김상기에게 거문고풍류를 배웠다. 이처럼 여러 무악 명인들에게 장단 등을 배웠을 뿐 아니라, 스스로는 가야금과 아쟁을 터득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우리 춤의 아버지’ 한성준의 무용단과 최승희무용단에서 반주악사로 활동하고, 1946년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악사가 됐다. 해금과 피리의 명인이자 양금, 해금, 태평소 등 악기를 다루는 데도 능했던 그는 작곡가로도 천재적 능력을 발휘했다.
이보형 한국고음반연구회장은 지영희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전통음악을 전반에 걸쳐 학습할 수 있었” 고 해방 후 6·25를 거치면서 “황폐해진 전통문화 재건”에 나설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수많은 악기에 정통했던 그는 국악예술학교와 오늘날 대학 국악과의 교과과정을 짜는 데 기초를 닦았다.
방대한 민속악 자료를 정리한 점도 독보적 업적이다. 그가 남긴 자료집은 ‘국악계의 바이블’로 통한다. 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장은 “지영희가 생전에 민속악을 악보로 정리해 놓은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산더미처럼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상당수 분실됐다가 딸 지성자가 찾아내 <지영희 민속음악 연구자료집>으로 출판했다”라고 전했다. 자료집은 가야금 명인인 지영희의 부인 성금연(1923∼1983)이 엮어낸 것으로 이번에 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오늘날 연주되는 해금산조는 지영희 선생이 본류이다. 한성준이 우리 춤의 아버지라면, 지영희는 우리 민속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컬을 만하다. 우리 전통음악을 아우르는 통섭적인 업적에 대한 평가가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더욱 확산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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