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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희 국악관…“광복 70주년 개관은 운명 같은 일”

“규모 작지만 북두칠성처럼 빛날 것"

   평택시민신문.  2015. 8. 26.
 

민족음악의 보존과 확산을 위해 영혼을 바쳤던 지영희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평택호 관광단지 한국소리터에 마련된 ‘지영희 국악관’이 8월 26일 정식 개관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민족음악 알리기에 나선다. 경기관광공사에서 근무하던 중 지영희 선생의 스토리텔링 작업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돼 ‘지영희 국악관’ 개관까지 각별한 애정을 갖고 모든 과정을 함께한 경기관광공사 평택아산연계사업단 오민아 과장을 만나 지영희 국악관 개관의 경과와 의미에 대해 들어보았다.

“지영희 선생님의 스토리텔링을 준비하며 민족과 민족음악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그 분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어요.”
오 과장은 비록 사료와 유물, 음악을 통해 선생과 만났지만 그 강렬함은 생전의 모습과 대면한 듯 했다고 한다.

평택 포승읍 내기리의 무속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승무·검무 등 여러 춤과 함께 양금, 단소, 퉁소, 해금, 피리, 대금 등 다양한 음악을 배우고 가르쳤던 지영희 선생은 서슬 퍼런 일제 식민지 시절 최초의 국악관현악 ‘만춘곡’을 발표해 민족음악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영화음악 작곡, 사라진 악기 복원, 비파․아쟁 등의 개량, 전국 각지의 민요 녹음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펼치며 열정을 불살랐던 선생은 당시 국악협회 관계자들의 견제와 핍박을 피해 하와이로 이민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스토리텔링을 구성하는 작가로서 이러한 사실들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사업단원들과 함께 국악관 설립 계획을 수립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오 과장은 “지영희 국악관 개관은 누구 한 사람의 노력이었다기보다는 선생의 열정과 정신을 사랑한 시민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난해부터 세 차례에 걸쳐 열린 ‘지영희 특별전’을 다녀간 시민들이 상설 전시관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서명운동을 벌였고 많은 이들의 노력이 모아져 국악관 개관의 결실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오 과장은 자신을 포함해 사업단 구성원들이 국악관 개관을 위해 해온 일들의 가치를 높이고 준비하는 내내 행복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원동력도 시민들에게로부터 나왔다며 모든 공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올 해에 지영희 국악관이 개관한 것은 마치 운명 같은 일”이라는 오 과장은 “일제 강점을 한 해 앞둔 1909년에 태어나 식민지하에서 국악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셨는데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 개관을 할 수 있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며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 의미는 태산처럼 크고 북두칠성처럼 빛날 것”이라고 개관 소감을 밝혔다.

“규모 작지만 북두칠성처럼 빛날 것"